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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예술인 전시]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한 것들

  • 5월 20일
  • 3분 분량

이정숙 초대전 《관계 觀界 Interconnected Verknüpfung》 가 우리에게 남긴 것


2026년 5월, 갤러리바다는 이정숙 작가의 초대전 《관계 觀界 Interconnected Verknüpfung》 을 개최했습니다. 5월 6일부터 29일까지 약 한 달간 이어진 이번 전시는, 독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작가의 오랜 철학적 고민들을 가득 담은 자리입니다.

학생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가졌던 이정숙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계속 그리면서,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나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미학 석사 과정을 거쳐,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까지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전시는, 작년부터 비바리퍼블리카 소속 장애예술인으로 근로를 시작한 후부터 작업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작가로서의 철학적 고민들을 담아낸 전시입니다.


'관계 觀界' — 경계를 바라본다는 것

갤러리바다 이정숙 초대전 전시 포스터
갤러리바다 이정숙 초대전 전시 포스터

이번 전시의 한글 제목은 '관계'입니다. 하지만 포스터를 살펴보시면, 부제들이 나란히 적혀 있습니다. 단순히 같은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긴 것이라면 분명 비슷한 의미의 단어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조금씩 다른 의미를 담은 단어들이 적혀 있죠.

한자 제목 '觀界'는 우리가 익숙하게 써 온 관계(關係), 즉 빗장으로 엮이고 이어진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볼 관(觀)'과 '경계 계(界)'를 써서 '경계를 바라본다'는 감각으로 관계를 다시 씁니다. 영어 부제 'Interconnected'는 관계를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이어지고 확장되는 과정임을 드러냅니다. 독일어 'Verknüpfung'은 단순한 연결을 넘어 서로 다른 요소들이 구조적으로 엮이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결합을 뜻합니다. 세 언어가 함께 부제에 담긴 것은, 미술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철학으로 사유의 경계와 언어의 경계를 넘어 온 작가의 인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대표작 소개

아름답고 의미있는 작품들이 많은 전시였지만, 그중에서도 작가의 철학을 담은 대표작 세 점을 소개합니다.

이정숙 작가의 '산'
이정숙 작가의 '산'

연작 '산'은 16점의 작품이 이어 붙여진 형태의 작품입니다. 작가의 절친한 친구가 스페인 몬테네그로 산 근처에 살며 매일 찍어 보내준 사진을 모티브로 그린 작품들입니다. 같은 산을 그렸지만, 어느 날은 노을에 잠겨 있고, 어느 날은 별이 흩뿌려진 밤하늘 아래에 있습니다. 추상적으로 그려내기도 하고, 산과 관계없어 보이는 이미지가 함께 있기도 합니다. 같은 대상을 그리더라도 대상을 바라보는 위치와 시점, 마음 상태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1. 물고기는 존재하는가, 나무는 존재하는가


'물고기는 존재하는가' 와 '나무는 존재하는가' 연작은 룰루 밀러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출발했습니다. 작가는 이 작업을 '일반 명사 뒤에 숨겨진 유일무이한 존재의 생명력을 포착하려는 간절한 질문'이라고 작가노트를 통해 표현했습니다. 수많은 개별 특성을 가진 존재들을 단 하나의 이름으로 묶는 인간의 습관 안에 가려져 있는 고유한 존재들을 떠올려 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1. 나는 지금 어때?

이정숙 작가의 '나는 지금 어때'
이정숙 작가의 '나는 지금 어때'

연작 '나는 지금 어때'는 노란색, 붉은색,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입니다. 거울을 둘러싼 바깥의 삼각형들은 모든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다양한 빛의 스펙트럼을 보여줍니다. 거울에 비친 '나' 또한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하나의 정체성으로 나를 정의할 수 없듯이 거울 앞에 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 물어보고 궁금해하기를 권합니다.


함께 완성해 가는 작품

이번 전시에는 관람객이 직접 참여해 완성해 가는 공동 작품 구역이 있습니다. 작가가 미리 준비한 밑그림과 재료 위에, 관람객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자리에 또 다른 누군가의 손길이 얹어지면서, 작품은 전시 기간 내내 매일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전시 오프닝날에는 이정숙 작가의 친척이자 현대미술의 거장인 이건용&승연례 부부도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전시 주제인 '관계'를 관람객 스스로 몸으로 경험하게 하는 구조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서로 이어져 있음'을 전시를 보며 실제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합니다. 누군가가 그린 나무가 다른 사람에게는 그 나무에서 쉬는 토끼를 상상하게 하고, 누군가가 그린 바닷물을 보며 누군가는 모래사장을 그리기도 하면서 모두가 서로 연결됩니다.


한 작가가 안정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는 것

좋은 전시는 좋은 작품에서 출발하지만, 좋은 작품은 작가가 안정적으로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믿습니다. 이정숙 작가는 ARTOVE 아트오브를 통해 비바리퍼블리카 소속 예술인으로 활동하며 일상 속 창작활동을 지속해 왔고, 그 시간들이 모여 이번 초대전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은 종종 단발성 프로젝트나 일회성 지원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하지만 한 명의 작가가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펼쳐 내기 위해서는,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 년에 걸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작가가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안정적 기반입니다.

이번 전시는 그 기반이 어떻게 작품으로, 다시 전시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입니다. 작가를 고용한 기업은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한 예술인의 창작이 사회와 만나는 통로를 함께 만든 주체입니다. 갤러리바다는 그 작업이 관람객들과 이어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였고, 아트오브는 작가가 기업과 만날 수 있도록 합니다.


전시의 막을 내리며

오는 5월 29일, 전시는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정숙 작가의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작가는 그동안 쉽게 도전하지 못했던 개인전과 그룹전을 마음껏 펼쳐보일 생각에 늘 설레어 합니다.

이번 이정숙 작가의 초대전 '관계'는 한 작가의 전시였지만, 동시에 이정숙이라는 한 사람이 작가로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여러 관계들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관계, 그리고 장애예술인을 포함한 예술인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오래도록 꿈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많은 관계들까지.


여러분의 주변에는 어떤 고마운 관계들이 함께하고 있나요?




전시 개요

전시명: 관계 觀界 Interconnected Verknüpfung 작가: 이정숙 (비바리퍼블리카 소속 장애예술인) 기간: 2026년 5월 6일(수) – 5월 29일(금) 관람시간: 평일 10:00–17:00 (주말·공휴일 휴관) 장소: 갤러리바다 (경기도 과천시 과천대로7나길 37, The M 별관 105호) 주최·주관: ARTOVE, 갤러리바다 관람료: 무료 (1시간 무료 주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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